내가 태어난 곳 ‘시모고비’ 방문기
손 영 복
2004. 4. 30 - 5. 2. 3일간 아내와 누님 두 분, 형님 내외분, 동생내외와 함께 내가 태어난 일본 기후갱 가무군 고비조 ‘시모고비’를 방문하기 위해 김해 국제공항에서 아시아나 비행기를 탔다. 꼭 한번 가보고 싶었던 ‘시모고비’를 60여 년 만에 방문하는 것이다. 비행기는 김해공항을 이룩한 지 한 시간 20여 분 만에 바다 위에 떠 있는 오사카 국제공항에 도착했다.
오사카 공항은 인공 섬이고 육지와 연결되는 다리는 스카이 게이트 브리지(SKY GATE BRIDGE)인데 길이가 3750m나 되었다. 잠시 후 버스는 오사카성을 향하고 있었고, 가이드는 일본에는 큰 건물은 극소수이고 주택은 거의 2층인데, 1층은 주방으로 사용하고, 2층은 침실로 사용한다고 한다. 버스 운전석, 승객이 내라는 문, 버스 차선 등이 우리나라와 반대였다. 이어 252층 월드 트레이딩 센터(WORLD TRADING CENTER)를 지나 오사카성에 도착했다. 5층 규모의 성 주위에 물이 있었고, 안에는 풍신수길, 덕천가강 등의 사진과 업적 등이 전시되어 있었다. 오사카시 뒤쪽에는 록고산이 있고, 그 앞쪽에는 비교적 부유층이 사는 주택들이 있었다. 이어 온천욕을 하고 호텔에 와서 석식으로 뷔페를 먹었는데, 된장국, 김치찌개가 맛이 좋았다. 11층 객실을 배정 받아 가족회의를 하고 오사카의 첫 밤을 보냈다
이튿날, 내가 태어난 곳 ‘시모고비’ 방문 날이었다. 푸른 하늘에 날씨는 이날따라 너무나 맑았다. 조식 후 호텔 밖에 나오니까 벌써 24인승 버스와 일본인 기사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버스는 4시간 20분을 달려 나고야를 거쳐 ‘시모고비’ 옆 동네의 미노오다역 앞에 도착했다.
잠시 후에 내가 태어난 집에 도착한다는 것이 현실로 다가왔고, 아버지 어머니께서 무일푼으로 이곳에 오셔서 여러 가지 어려움과 싸우시면서 사셨던 ‘시모고비’를 눈앞에 두고 나는 한없는 감동과 감회를 느끼고 있었다. 역 앞에 큰 느티나무가 서 있었는데 그 나무를 보는 순간 아버지 어머니께서도 이 나무를 수없이 보셨겠지 하는 생각을 하면서 몇 번이나 나무를 쳐다보았다.
‘미노오다’역. 얼마나 많은 우리 가족의 희로애락이 담겨져 있는 곳인가! 아버지 어머니께서 한국에서 일본으로 처음 오실 때에도 오사카, 나고야를 지나 이 역에서 기차를 내리셨을 것이다. 또 오사카, 나고야 등지로 장사를 가시고 오실 때에도 이곳에서 타시고 내리셨을 것이며, 누님들이 오사카에 누룩을 지고 판매하러 갈 때에도 이 ‘미노오다’ 역에서 기차를 탔던 것이다.
이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큰 누님께서는 “아! 저 골목으로 가면 우리 집으로 간다.” 형님께서도 “아! 저 다리가 내가 놀던 다리다.”라고 하셨다. 잠시 후 버스가 우리 집 앞에 도착했다. 그러나 우리 집은 철거되고 빈터만 남아 있었다.
나는 내가 태어난 집 한복판에 서서 아버지 어머니께 기도를 올렸다. “아버지 어머니께서 그렇게 사랑하시던 히데오가 ‘시모고비’ 우리 집에 왔습니다.”라고. 우리 집이 있던 바로 뒤쪽에 문패가 달린 집이 있었는데 형님께서 보시더니 ‘내 친구 집이다’라고 하신다. 그 친구는 물론 일본 사람이다. 초인종을 몇 번 눌러보아도 아무 대답이 없기에 다시 골목으로 나오니까 일본인 여자가 있었는데, 그 사람이 한국인 부부가 살고 있는 집을 안내해 주었다. 우리들을 반갑게 맞아 주는 주인과 서로 인사를 나누고 차와 과자를 대접 받고 우리도 한국에서 가지고 온 김, 법주, 소주 등을 선물로 주었다. 그 집 아주머니의 일본이름은 ‘기미꼬’였다. 형님께서 3, 4명 옛날 친구의 이름을 말하니까 친절하게 여러 곳에 전화를 해 주었다.
그 집에서 한 시간여 동안 여러 가지 이야기를 나누다가, 운전기사와 ‘기미꼬’ 여사를 데리고 식당에 가서 일본 전통음식으로 점심 식사를 하였다. 식사 후 우리는 ‘기미꼬’ 여사의 안내를 받아 누님, 형님이 다니셨던 고정(古井)소학교에 갔다. 그러나 그 곳은 학교 건물이 철거되어 운동장만 남아 있고, 신축 학교는 약 100m 되는 곳에 있었다. 큰누님은 교문이 있었던 곳을 가리키면서 학교 구조에 대해 자세히 말씀해 주셨고, 5학년과 2학년까지 다닌 형님과 작은누님도 그 당시의 학교에 대해 상세히 설명해 주셨고, 나도 우리 집 앞 도로와 학교까지 가는 길을 기억할 수 있었다.
이어 새로 신축한 소학교에 갔다. 공휴일이라 교무실은 잠겨 있었으나 운동장과 강당에서 초등학교 운동선수들이 야구 및 배구 연습을 하고 있었다. 누님과 형님들은 옛날에 다니시던 학교에 왔으니까 얼마나 감개가 무량하시겠는가! 형님은 계속해서 사진을 찍으셨다. 학교 방문을 마치고 돌아오면서 누님께서는 한 집을 가리키면서 큰외삼촌 집이었다고 하셨다. 큰외삼촌이 먼저 일본에 가셨고, 부모님들은 큰외삼촌의 주선으로 일본에 가셨다고 한다.
부모님들은 그 곳에서 농사도 많이 짓고, 잡화상, 고물상도 하시고, 누룩장사도 하셔서 많은 돈을 버시어 틈틈이 한국에 있는 고향에 논과 밭을 많이 사셨는데 해방이 되어 정부가 수립되고 토지개혁이 실시되어 10마지기 외 모두 소작인에게 빼앗겼으니, 정부가 하는 일이지만 참 가슴 아픈 일이었다.
그 당시 누룩은 일본 정부에서는 개인이 만드는 것을 불법으로 규정하고 있었는데 여기에 관한 일화 3가지를 적어 본다.
첫째, 일본 순사가 누룩 조사를 온다는 정보를 어머니께서 먼저 아시고 재래식 화장실 인분을 뒷마당 누룩을 묻어 둔 곳에 퍼부어 놓으니 우리 집에 일본 순사가 들어오자마자 기절을 하고 도망갔다고 한다.
둘째, 경찰서에 누룩에 관해 조사할 것이 있다고 연락이 오면 어머니께서는 2살 된 나를 업고 경찰서에 가셨다고 한다. 경찰서에 들어서자마자 나를 살짝 살짝 그렇게 아프지 않게 꼬집기 시작했고, 그때마다 나는 경찰서가 떠나가도록 큰소리로 울었다고 한다. 너무 시끄러우니까 일본 순사는 조사도 하지 않고 빨리 돌아가라고 했다고 한다. 나는 그 때 어머니에게 큰 효도를 한 셈이다.
셋째, 어머니는 이것저것 묻는 일본 순사가 귀찮으니까 마지막으로 돈으로기부를 해서 천황의 상장을 받아 방문 앞에 걸어 놓으니, 일본 순사가 현관에 들어와서는 조사도 하지 않고 상장에 경례를 하고 어머니께 수고한다는 인사까지 하면서 그냥 돌아갔다고 한다.
한국 사람, 일본 사람 통틀어 어느 누구보다도 근면 성실하신 부모님들은 벼, 고구마, 채소 등 농작물을 다수확하시고, 잡화상 고물상 등 상술에도 어느 누구의 추종을 불허하면서 열심히 번 돈을 13년 동안 5번. 상하의 옷 속에 일본 돈을 넣어 한국에 와서 논도 사고, 밭도 사고, 가난한 친척들에게 나누어 주기도 하고, 불우이웃도 많이 도우셨으니까 부모님들은 항일 투사였고, 진정한 애국자였다.
무일푼으로 일본 낯선 곳에 가서 8남매를 잘 키우시고 경제적으로도 성공하신 부모님의 개척정신, 근면성, 봉사정신 등은 참으로 고귀한 것이다. 오래도록 길이길이 남을 그 정신을 우리 8남매가 이어받았다고 이곳 ‘시모고비’에서 힘껏 외쳐 본다.
오후 3시 50분 ‘시모고비’를 출발하여, 오사카 파크 호텔에 돌아와서 방문 결과 및 성과를 충분히 토의하고, 이튿날 3일째, 오사카 국제공항을 출발하여 오후 1시 30분 무사히 김해 국제공항에 도착하여 내가 태어난 곳 ‘시모고비’ 방문 일정을 모두 마쳤다.
손 영 복 / 48회 월간 모던 포엠 수필 부문 등단 (2010년), 수필집 「내가 걸어 온 교직의 길」, 전 중등학교 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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