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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은 종교개혁 500주년의 해

정광국 2017. 1. 21. 17:39

                                  2017년은 종교개혁 500주년의 해

                                                                                                                                                   

                                                                                                                                 정 광 국

루터는 1483년에 독일에서 광산을 가진 부유한 집안에 태어나 교수가 되어 성서와 신학을 강의하던 사람이었다. 그의 첫 번째 인생의 전환점은 어느 비오는 날 함께 길을 가던 친구가 벼락에 맞아 숨질 때, 너무 급한 순간 “ 하나님, 살려 주시면 신부가 되어 평생을 헌신 하겠습니다” 라고 서원하면서 일어났다.

신부가 된 후 거룩한 삶을 살겠노라고 한 그에게 계속 실망스런 일들만 연속 되었다. 보는 것과 알게 되는 모든 것들이 부패되어 있었다. 가장 깨끗해 보여 찾아간 베네딕트에서도 그를 만족하게 하지 못했다. 기대를 가지고 간 로마 교황청 방문에서는 실망의 절정을 맞았다. 처음 그는 종교개혁이라는 큰 틀이 아닌 캐토릭 개혁을 희망 하였다. 너무나 잘못되어 있어 개혁해야 할 95개 조항을 비텐베르크 성당에 붙이자 교계와 교황청과 왕과 높은 귀족들 모두가 놀라게 되었다.

그 내용들로 설교를 계속하자 그 파급이 너무 크서, 교황의 권위 아래서 마음대로 자기들의 권위를 누리지 못하던 귀족들이 참여하는 수가 날로 늘고 큰 세력으로 되어갔다.

교황청은 급히 최고로 토론과 설득의 전문가였던 한 추기경을 보내었으나 루터의 논조와 면죄부에대한 비판을 당해내지 못하자 결국 루터를 죽이기로 결정하였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독일 나라의 왕 다음으로 권력을 가진 프리드리히 공작이 루터를 몰래 잡아 자기 소유의 철옹성 같은 성에 가두어 보호하게 하셨다. 그 공작은 교황권이 약해지면 언젠가 루터가 쓸모 있으리라 생각했던 것 같다.

너무나 안전한 그 성안 큰 건물에는 생활하기에 아무 불편 없는 시설들과 파이프 올갠이 있는 성당과 그 아래층엔 연회장까지 갖추어져 있었다. 그곳 한 조그마한 벽난로가 있는 방에서 실제로 종교개혁의 큰 물줄기를 이룬 신약성서를 독일어로 번역하는 오랜 시간 동안 교황청은 아무리해도 루터를 찾을 수가 없었다. 성경은 특별한 신부들 외에 그 누구도 읽지 못하게 되어있어 우리 일반 성도들이 이 성경을 읽을 수 있게 된 것은 루터를 통해 주신 하나님의 크신 은총이 아닐 수 없다. 지금도 독일어의 모든 문법의 기본은 그때 루터가 번역한 성서가 표준이 된다고 한다.

하나님은 루터를 사용하셔서 “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께서 인간에 대한 특별한 은혜와 사랑을 주시고, 인간은 이에 신앙으로써 응답해야 한다”

고 강조하며 오늘날 우리가 감히 누리는 만인 제사장의 길이 열리게 해 주셨다.

또 루터는 “사람의 구원은 어떤 개인(교황이나 신부)의 손에 일임하지 않았고, 인간의 행위가 아닌 믿음이 중요한 것임”을 강조 하였다.

교황의 지배를 벗어나려하던 왕과 귀족들이 루터를 보호하게 하심으로 루터의 종교개혁은 실패하지 않고 그다음 주자들인 칼빈과 여러 후속자들에게 넘겨 줄 수 있었던 것 같다.

1521년 로마교황으로부터 루터의 파문은 중세를 마감하고 르네쌍스를 열고 근대를 여는 계기가 되기도 하였다. 그 뒤 루터는 수녀였던 아내의 도움과 당시 유명한 학자였던 멜랑히톤이 있어서 루터에게 부족한 것은 자기보다 젊은 그가 도움으로 루터의 종교개혁을 이어 받을 뿐 아니라 루터의 정신을 이어받는 종교개혁가가 되었다. 이와 같은 개혁은 이미 100년 전 요한 후스(거위라는 뜻)에 의해 시도 되었으나 실패하여 화형을 당하면서 말한 예언이 유명하다.

“ 나 거위는 실패하였지만 100년후엔 백조가 나타나 꼭 이룰 것이다”

실제로 100년 뒤 나타난 그 백조는 바로 루터 였다.

하나님의 계획은 참으로 놀랍고도 놀랍다.

루터가 개혁한 독일의 서너 교회를 가보니 성모 마리아상 대신에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신 동상으로 바뀌거나, 큰 창문으로 내부가 밝아지고 강단이 단조롭게 바뀌긴 해도 아직 캐토릭 성당 분위기를 많이 벗어나진 못 했다.

칼빈을 거치면서 프로테스탄트는 영국 - 미국 - 한국으로 오면서 그리고 시간이 흐르면서 현제의 개신교회로 바뀐듯하다.

“ 만약 루터의 종교개혁이 없었다면” 하는 질문을 던져보면 정말 당황스럽다.

하나님 말씀은 신부를 통하지 않으면 도무지 들을 수 없을 것이고, 하나님의 말씀도 사랑도, 예수님의 말씀도 사랑도 지금처럼 잘 알지 못 했을 것이다.

그리고 구원의 계획도, 감사도 잘 알지도, 깨닫지도 못 하여 마치 구리로 만든 옛 거울 속을 들여다보는 것 같이 희미하고 답답했을 것 같다.

 

# 종교개혁 500주년을 1년 앞두고 독일에서 루터의 발자취들을 다녀와서.

 

# 대구 성덕교회 원로 장로.

    전, 대구 장로합창단 부단장.

    전, 대구 송현여고 교장.

    전, 대구 수성장노회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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