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창시절의 그리운 추억이 있다.
그 때는 학교에 호통치는 선생님들이
계셨다.
기준 점수 아래인 학생들을 교단 앞에 엎드리게 한 후 빳다
(매질 할 때 사용하는 막대)로
때렸다.
점수가 모자란 만큼 맞았다.
그런데 하루는 내 점수가 기준 점수 아래가
아닌데
나를 불러 엎드려 뻣쳐를 시키며 빳다를 치신다.
억울하고 분했다. 선생님은 빳다를 치면서
중얼거리셨다.
너는 더 좋은 점수를 낼 수있는데
이 점수 밖에 못낸것은 더 나쁘다며 호통을
치셨다.
그 호통소리가 지금도 들린다.
너는 더 잘 할 수 있는데 하지
않았으니
더 나쁘다는
호통소리.....
부모의 입장에서 생각해
본다.
아이가 자라는 과정에서 호통 한 번 제대로 친
적도 없고
그저 몸 상할까 마음 상할까 애지중지,
노심초사하면서 키운다.
주변을 둘러보면 가정이든
학교든,
호통, 야단, 불호령을 내린다는 말을 들어본
적이
얼마나 되었는지 모른다.
정말이지 호통은 어디로
사라졌을까?
호통의 국어사전 정의는 ‘몹시 화가 나서 큰소리로
꾸짖음’이다.
얼핏 부정적 뉘앙스가 강하지만 사실 호통은 굉장히
긍정적이다.
호통은 누가 치는가?
모르는 사람이 아니라 아는 사람이라는 것을
전제한다.
전혀 모르는 사람에게 호통칠 수
없다.
가깝고 애끼고 사랑하는 사이에 존재하는 것이 호통이다.
그러기에 부모는 자식에게 호통을 칠 수 있어야
한다.
호통을 안 듣고 자란 자식은 가지만 무성한
나무처럼
겉만 무성할 뿐 열매를 맺지 못한다.
심리적 맷집이 너무 약한 채로 어른이 되고 만다.
상처를 주는 ‘비난’의 언어는 공격형
언어이다.
그러나 호통은 어떤 잘못이나
부족을
‘깨닫게’하는 데 목적이 있다.
비난하긴 쉬워도 호통 치기가 어려운
이유는
호통을 치려면 상대를 잘 알아야하기 때문이다.
호통을 듣는 대상이 얼마만큼의 심리적
맷집을
가졌는지도
알아야한다.
심리적 맷집이 좋은데 잘못된 길을 가고
있거나
게으름에 빠진 사람에게 호통은
주마가편
(走馬加鞭-달리는 말을 채직질하다)
의 원리가
해당된다.
옛날로 돌아간다.
“만점도 받을 수 있는 놈이 이 따위 점수를
받아?”
호된 매질을 하실 때의 호통소리.
아마 그 때 선생님의 매는 아까워서, 아쉬워서,
안타까워서,
가능성을 게으름 때문에 묻어둔 제자를 그냥 두고 볼
수 없어
호통을 치신 것이다.
억울하고 화가 나기보다 그저 송구하고 부끄울
뿐이었다.
지금도.
문득 문득 ‘정말 인생을 이렇게 살아도 되는 걸까?’
‘정말 이렇게 사는 것이 맞는 인생일까?’ 라는
생각이 들 때,
무언가 중요한 일을 결정해야 할
상황인데
현명하게 처리하지 못할 때,
아니면 꼭 해야 할 일인데도 게으름의 노예가 되어
있을 때
‘빳다’를 들고 나타나셔서 호되게
호통을 쳐 줄 그 선생님이 그립다.
Eres tu (그대는) / Mocedades ~♪~